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나를 와인에 빠지게한 결혼 기념일 와인 한 잔, 그리고 반전

본 콘텐츠는 만 19세 이상 성인을 대상으로 합니다.

나는 원래 소주파였다. 회식도 소주, 친구들이랑 놀 때도 소주, 집에서 혼자 마실 때도 소주. 와인은 가끔 궁금해서 사다 마시는 정도였고, 그마저도 늘 비슷한 걸 마셨다. 미국식 레드, 그중에서도 카베르네 소비뇽. 소주파들이 보통 그렇듯 진하고 묵직한 맛에 끌렸다.

비싼 와인을 마셔볼 기회도 몇 번 있었다. 그때도 반응은 “와, 맛있다” 정도였지, 거기서 뭔가에 깊이 빠져든 적은 없었다. 좋아하긴 하는데 궁금하지는 않은 상태. 딱 그 정도의 거리감이 나와 와인사이에 있었다.

이 글은 그 거리감이 깨지고 나를 와인에 빠지게 한 계기 그리고 약간의 반전 이야기다.

와인 리스트가 없는 바

결혼 2년차 기념일에 숨어있는 맛집 겸 와인바를 하나 찾아갔다. 어디였는지는 말하지 않으려고 한다. 이유는 뒤에 나온다.

기념일이라는 것도 한몫했겠지만 공간 분위기 자체가 좋았고, 직원분도 친절했다. 특이했던 건 와인 리스트가 따로 없었다는 거다. 대신 “오늘 어느 정도 가격대로 생각하세요?” 하고 물어보시고, 그 대답에 맞춰 여러 병 추천 해주는 방식이었다. 리스트를 훑어보며 아는 이름을 찾는 게 아니라 그냥 맡기는 느낌. 처음 겪어보는 방식이라 신기했고, 이상하게 믿음도 갔다.

에피타이저로 빵과 수제 버터가 나왔는데 한입 먹자마자 기분이 더 좋아졌다. 그 좋은 기분 상태로, 첫 잔이 나왔다.

“아, 이게 사람들이 와인에 열광하는 이유구나”

솔직히 이 감정이 순수하게 와인 때문이었는지는 지금도 확신 못한다. 분위기, 서버분의 설명, 기념일이라는 핑계까지 다 섞여있었을 거다. 그걸 감안해도 그 첫 모금은 확실히 뭔가 달랐다.

그때까지 내가 알던 화이트 와인은 미국 샤도네이, 뉴질랜드 소비뇽 블랑 정도가 전부였다. 그런데 이 와인은 그 둘 사이 어디쯤 있는 느낌이었다. 적당히 높은 산도에, 서버분 표현으로는 오크 뉘앙스가 살짝 들어간 바디감, 그리고 은은한 단향. 소비뇽 블랑처럼 쨍하지도 않고 샤도네이처럼 묵직하지도 않은, 그 중간 어딘가. 같이 나온 에피타이저들과의 조합까지 다 맞아떨어지니까 “와인이 복잡하고 다양한 맛을 낸다”는 말을 그제서야 몸으로 이해한 기분이었다.

가격은 기억으로 10만원 안팎이었던 것 같다. 바에서 파는 가격치고 압도적으로 비싼 건 아니었을 텐데도, 평소 마시던 와인들과 체감 차이가 너무 커서 그게 더 놀라웠다.

그날 마신, 그리고 찍은 화이트와 레드. AI로 배경만 와인바 특정을 피하기 위해 살짝 바꿨다.
이제는 술 사진도 병과 높이를 맞춰서 찍고 앞 라벨에 Vintage가 없으면 꼭 돌려서 빈티지를 찍어두지만,

아직 와인과 친하지 않았던 그 시절 나는 ‘이 와인들 맛있었다’ 하면서 이 정도 찍어둔 게 전부이다.

“샤도네이랑 같은 품종인데, 프랑스에서는 샤르도네라고 불러요”

와인을 잘 아는 편은 아니었다. 그때 내가 아는 거라곤 품종은 소비뇽 블랑, 샤도네이, 카베르네 소비뇽 정도, 마셔본 와인의 나라는 미국, 호주, 뉴질랜드, 스페인 정도, 그리고 “마니아들은 유럽 와인을 더 좋아한다더라”, “결국은 프랑스 와인으로 통한다” 하는 말들을 들어본 정도였다. 유럽 와인 특히 프랑스 와인은 라벨부터 어려워 보여서 관심을 가져볼 생각도 안 했고 엄두도 안 난 것이 사실이다.

그런데 서버분이 이 와인이 프랑스 와인이라고 하시길래, “저는 화이트는 미국 샤도네이 정도밖에 안 마셔봐서 그런지 많이 다르네요” 했더니… 지금 마시는 것도 내가 아는 그 샤도네이랑 같은 품종인데, 프랑스에서는 “샤르도네”라고 부른다고 설명해주셨다.

그 설명이 생각보다 크게 다가왔다. 같은 포도인데 나라마다 이름도 맛도 이렇게 다르구나 싶었다. 프랑스 와인이라는데 라벨도 복잡하지 않고 오히려 심플했다. 그 순간부터 이 와인에 대한 개인적인 호감도가 확 올라갔다.

화이트를 다 마시고 프랑스에 친밀도가 혼자 높아져서 레드도 프랑스로 추천을 부탁했다. 부르고뉴 피노누아(Bourgogne Pinot Noir)를 다음 병으로 마셨고, 조금 더 취해서 혹은 기분이 더 좋아져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이것도 좋았다. 카베르네 소비뇽과는 조금 다르지만 음식들과 잘 어우러지는 멋진 레드와인이라고 생각했다. 이날 이후로 나는 자연스럽게 프랑스 와인에 관심이 갔다

2년 후,

그 뒤로 와인에 관심을 갖고 몇 년간 나름 경력(?)을 쌓았지만, 그날 마신 화이트 와인은 그 이후로 만나지 못했다. 그래도 나를 와인에 관심을 갖게 해준 와인이라 기회가 되면 꼭 먹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.

그러다 한 2년쯤 지난 시점에 어느 매장에서 우연히 이 와인을 발견했다. 반가운 마음에 바로 집었다. 계산하면서 직원분한테 “이 와인 때문에 제가 와인을 좋아하게 됐는데 그동안 잘 안 보이더라고요” 했더니, 이 와인이랑 이 수입사는 원래 소매점보다는 와인바나 레스토랑 쪽으로 주로 납품한다고 알려주셨다. (이렇게 바·레스토랑 위주로 유통되는 걸 업계에서는 온트레이드(On-trade)라고 부른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됐다.) 지금은 그래도 매장에서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보이는 와이너리 와인이 됐다.

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이 와인이 루아르(Loire) 와인이라는 설명이 이어졌고 나는 자연스럽게 “아 루아르인데 샤르도네를 쓴 게 신기하네요” 했다. 그런데 돌아온 대답이 “슈냉블랑이예요”였다.

띠옹 ! 몇 년 전 이 와인 때문에 와인을 좋아하게 됐을 때 샤르도네라고 알려주셨었다고 말씀드렸더니, 직원분이 (조금 황당해하셨지만..) “아 그래도 그럴 수 있어요” 하시면서 더 설명해 주셨다. 이 와이너리에서 이 와인을 슈냉 블랑이지만 오크통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여 일부 샤르도네와 비슷한 뉘앙스도 있을 수 있다는 거였다. (혹은 지금 쓰면서 생각해 보니 진짜 작은 확률로 내가 딱 봐도 초보이니 슈냉블랑이라고 하면 너무 어려워할까 봐 그냥 샤르도네라고 했나 싶기도 하다.)

슈냉 블랑, 알고 보니

정리하면 이렇다. 그날 마신 화이트 와인의 정체는 프랑스 루아르 지역의 슈냉 블랑(Chenin Blanc) 품종으로 만든 와인이었다.

  • 샹팔루 르 포르타이유 (Champalou, Le Portail) — 품종: 슈냉 블랑 (Chenin Blanc)

첫 번째 바에서 “샤르도네와 같은 품종”이라던 설명은 정확한 정보는 아니었다. 다만 오크를 적극적으로 쓴 이 와인의 특성상 일부 샤르도네 같은 뉘앙스를 느낄 수 있었을 수 있다. 이게 그 바 이름을 조심스럽게 말 못 하는 이유다. 음식도 분위기도 서비스도 다 좋았으니까, 그냥 이 부분만 살짝 아쉬웠다고 해두고 싶다.

집에 와서 다시 열어봤다, 근데

당연히 그 와인을 좋은 날 집에서 다시 열었다. 결과는? 좋았다. 근데 당연히 그날의 그 감동은 없었다.

빈티지가 달랐을 수도 있고, 몇 년간 경력이 쌓이면서 내 입맛의 기준점 자체가 달라졌을 수도 있다. 그래도 그 감동과 경험과는 많이 차이가 낫다.

이 경험을 통해 확실히 느낀 게 하나 있다. 와인이 주는 감동은 와인 자체의 맛과 와인의 서빙 온도나 잔의 형태같이 기술적 요소도 중요하겠지만, 그날의 추억, 분위기, 함께한 사람과 같이 그 외 요소들이 어쩌면 더 중요할 수 있다는 것. 그러니까 결국 제일 중요한 건 지금 내가 마시는 와인이 나에게 혹은 같이 마시는 사람(들)의 입맛에 맞고 분위기와 어우러져서 맛있다고 느끼는지 그게 제일 중요하다. 품종과 산지는 그다음이 아닐까.

이 계기로 나는 진짜 와인에 관심을 갖게 됐다. 다음편에서는 이왕 이야기해본 김에 샤르도네 샤도네이 차이도 써보고 나를 와인에 끌어드린 그 와인 샹팔루 르 포르타이유와 슈냉블랑도 기회되면 적어보겠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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